답사이야기/제주문화유산답사회

효돈·토평(20161009)

비단순주 2017. 2. 24. 00:23

제273차 정기답사 효돈·토평

일시 : 2016년 10월9일

안내 : 구담 김보성


"내가 마음의 주인이 되면 세상의 주인이 된다."

구담선생님의 말씀


1.상효동 게시장

근처 채석장이 있어 돌로 만들기가 쉬웠다.

하효에 나무로 되어 있던 것이 비에 너무 젖어 돌로 만들게 되었다.

제주도에 2개 밖에 없다. 문화유적으로 가치가 있어 돌문화공원에서 복원했다.


[자료내용]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448번지(동상효) 서귀농협상효지소 동쪽 길가

유형 : 榜文石

시대 : 일제강점기

마을 중심지나 마을 주민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홍보물이나 마을 소식 등을 붙여 놓는 알림판이다. 보통은 방문석(榜文石)이라 부르고 있으나 이 마을에서는 '揭示場'이라고 명칭을 새겼다. 이 게시장은 비석의 돌집 형태로 궂은 날씨에도 알림 내용이 훼손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커다란 자연석 위에 평평한 대석 위에 설치했는데 옆 기둥은 각각 1개의 돌판을 이용하여 세웠고, 뒷면은 2개의 돌판을 이용하였는데 두 돌판 틈을 시멘트로 메꾸었다. 지붕은 기와지붕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표선면 성읍2리에도 하나 남아 있으며 마을에 따라서는 수명을 다한 말방아의 돌을 세워 사용하기도 하였다.



2. 상효동 저수지 제방과 수로시설(구명물)

[자료내용]

위치 : 서귀포시 신효동 산25번지. 월라봉 서쪽 일대

시대 : 일정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상효동 저수지 둑

논농사를 짓기 위해 수리조합을 결성하였다.

상효동 저수지 수로

신효리에서 1941년 결성된 수리조합은 돈내코 물을 끌어다 논농사를 지으려는 꿈을 갖고 출발하였다. 저수지 후보는 '동큰굴'로 예정됐으나 공사가 어려울 것 같아 지금의 월라산 서북쪽 상효 지경으로 정하고 1년 가량 공사를 하다가 자금 사정으로 공사를 중단했다. 1944년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저수지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던 중 불행하게도 신효 주민 2명이 흙사태로 운명을 달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당시 구장 김희수씨를 중심으로 신효동민장으로 장례를 지내고 계속 공사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미군정에서 창고를 장악하였고 시멘트 출하를 일시 동하였으나 각고의 노력과 교섭으로 미군정으로부터 시멘트를 지원받아 1947년 완공을 보았으며 저수지 앞 '가는도람위'와 '도람앞'에 논을 만들고 벼를 심었다.

밀감농사 붐이 일면서 벼농사의 혜택이 귤농사만큼 좋지 않았다.

가는 도람 위에는 그런대로 벼농사가 되었으나 도람 앞은 화산회토라서 물 빠짐이 심하여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 들어서 도람 앞 논은 페답, 밭으로 환원되고 가는 도람 위에서만 벼농사를 지어오다 귤나무 식재 붐을 타고 모든 논이 과수원으로 바뀌고 벼농사는 끝났다. 따라서 저수지도 밭으로 일구어 현재 시절재배농사를 하고 있다.(1996 『新孝마을』 56쪽) 남아 있는 시설은 제방 약 150m, 수문 일부, 수로 200여m, 배수로 등이다.


3. 상효동 조개물





[자료내용]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956번지. 서상효 마을회관 북쪽

시대 : 조선~

유형 : 수리시설

조선조 중종 14년 기묘사화를 피해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살면서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하여 파놓았는데 그 성을 따라 조가구→조가의성→조개물로 변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

당시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는 '조개물' 북쪽 약 50m 지점에 수령이 약 500년쯤 된 고목이 있으며 마을 나무로 보호되고 있다.


4. 상효동 채석장

[자료내용]

위치 ; 남원읍 하례리 산137번지 서쪽 효돈천. 상효동 146번지의 북동쪽

하례1리 효돈천을 낀 걸서악(걸쇠오름)의 경사 90도에 가까운 직벽 암석은 1980년대까지만해도 채석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명 걸서악 '소(沼)안밭' 채석장이다.

1900년경부터 성행했던 이곳의 석재업은 주로 묘소의 비석, 기념비, 공적비는 물론 돝도고리 등 생활용구와 건축용 자재 공급처이기도 했다. 도내에서는 이곳을 비롯해 안덕면 등 3~4곳에서 비석용 채석이 이루어졌다.

암석이 비교적 단단하고 암석조직이 연회색이고 치밀하여 비석에 적합한 석재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곳 돌로 비석을 만들면 비석에 꽃(돌에 생기는 이끼를 뜻함)이 잘 핀다고 한다.

하례리와 효돈 주변 산소의 비석은 거의 모두 소안밭 채석장에서 나온 것이며 현장에서 돌을 깨고 다듬고 숫돌로 밀어 완제품을 만들었으며 비문도 직접 새겼다. 암벽에서 로프를 이용하여 채석하던 중 인명사고도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비석들은 대부분 산남 지역에 공급되었으며 허(許), 현(玄), 강(康), 문(文)씨 집안 몇몇 분이 농한기를 이용해 부업으로 삼았다.(2001, 현권성, 노인회장, 75세)

무쇠솥으로 갈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5. 하효동 마을성담

[자료내용]

소재지 : 서귀포시 하효동 1번지의 서쪽과 남쪽 일대 및 뒷동산2로 일대

시기 : 1948~1953년

신효과 하효는 마을안길을 경계로 이웃해 있는 마을로서 4·3 때에 별로 피해를 받지 않은 마을이다.

그렇지만 1949년 1월에는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주민들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신효와 하효마을을 둘러싸는 성담을 쌓았다. 축성은 총연장 3,400m로, 하효동의 남녀노소를 총동원하여 집 울타리나 산담까지 가져다가 15일 만에 축조하였다. 동쪽으로는 효돈천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효돈중학교에서 100여m 북쪽, 남쪽은 현재 꿈초롱 유치원 동쪽에 남문이 있었으며, 서남쪽에는 새로 난 우회도로(동일주도로)보다 조금 남쪽에 서문이 있었다. 이를 외성이라고 하였는데 그 안에 다시 내성을 쌓았다. 외성 주위에는 약 10m 너비로 가시덤불을 가져다 놓거나 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아 세워서 무장대가 성담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소마다 총을 쏘거나 밖을 관찰할 수 있는 총안(銃眼)이 만들어졌고 큰길에는 성문이 설치되었다. 성문은 나무 틀에 철조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효돈중학교 북쪽 지점에 있는 성의 높이는 227m이고, 상단부 폭이 76cm, 하단부 폭이 155m이다. 성의 축조방식은 자연석 현무암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거칠게 다듬어서 내·외부를 쌓으면서 속은 잡석채움을 하였다. 석렬 외의 다른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효돈중학교 동쪽 효돈천변을 따라서 남북 방향으로 100m 정도, 동서로 뻗은 뒷동산2로를 따라 200m 정도이다. 표본으로 삼은 성석의 크기는, 하단부의 것이 너비×높이가 각각 65×18, 37×28, 31.5×27cm이고, 중단부의 것은 31×27, 24×24, 56×26cm이며, 상단부의 것은 33.5×24, 24×13, 24×15cm이다. 성의 상태는 바깥쪽은 높고 안쪽이 낮으며(外高內低), 지형 상태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北高南低). 성안에는 감귤과수원, 학교, 민가, 도로 등이 있다.(Daum 신지식)

4·3 때에는 주민들에게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양민증이 발급되었고 양민증을 갖고있지 않으면 자유로 통행할 수 없었다. 마을 수비에 가담한 단체로는 청년을 중심으로 韓靑(대한청년단), 학생을 중심으로 한 學聯(학생연맹), 40세 이상의 장년층으로 구성된 鄕保團이 있었다. 완장을 팔에 끼고 철창을 들고 다녔다. 1953년에 성을 허물었다.(新孝마을 69~70쪽)




6. 하효동 재일교포하효전화사업후원기념비

[자료내용]

위치 : 서귀포시 하효동 236번지(하효중앙로 132)

시대 : 대한민국

제주도의 전력 사업역사

년도

주요내용

기타

1926년

제주시 산지천 포구 40kw중유 발전기

일본인 거주지역 송전

1943년

서귀포 연외천 하류(현 천지연폭포) 서귀수력발전소

도내 유일 수력발전

1951년

제주 내연발전 보강


1956년

서귀포, 모슬포, 한림내연 발전소 건설


1966년

성산포 내연발전소 건설


1970년

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79년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1982년

북제주 화력발전소 건설


1996년

제주지역 송전계통 환산망 준공


1998년

제주와 전남 해남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건설


2009년~현재

제주화력발전소, 남제주 화력발전소, 한림목합화력발전소, 용수리, 행원리 풍력발전소에서 전력 공급



예전에는 밥을 짓기 위해서 저녁에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재(불치)속에 묻어 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 마른 검질을 이용하여 불을 지폈다. 밤 사이에 불이 꺼졌으면 이웃집에 불씨를 얻으려 다녔다.

밤에 이동할 때는 억새 마른 것을 뭉쳐서 만든 일명 '화심(홰심)'에 불을 붙여 흔들며 걸어갔다. 즉 횃불이라 할 수 있다. 집에 호롱불을 밝힐 때는 송지, 식물종자유, 동물유류를 이용하였다.

1965년 남제주군에서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을 전개하였다. 1개 시군에 1개 마을을 선정하여 지원하였다. 이때 김인방과 현학상이 중심이 되어 관계 기관을 방문하여 섭외한 결과 남제주군에서는 하효마을이 선정되었고, 북제주군에서는 협재리가 선정되었다.

당시 남제주군청에서는 하효마을이 전기사업에 필요한 자금 동원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소극적이였으나 김인방과 현학상이 도청을 방문하여 도지사를 면담하고 마을 주민들의 전화사업에 대한 열망을 설명하였다. 하효 주민들의 적극적 의지를 파악한 도지사는 남제주군청에 하효마을이 농어촌 전화사업 대상 마을로 선정하도록 지시하여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총 공사비는 약 9백만원이 소요되었는데 정부 융자금 340만원, 한전보상금 196만원이였다. 전기 가설 사업에 공사비가 부족하여 고향이 어려워 한다는 소식을 들은 하효마을 재일 친목단체인 재일공진회(在日共進會)에서는 향리전기가설후원회를 조직하여 일금 160만원을 모금하여 고향에 송금한다. 이에 하효마을 주민들도 십시일반 힘을 모아 나머지 290만원을 모금하여 1966년 11월 전기 시설 사업이 완료되어 점등하게 된다.

당시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이용하여 성판악을 지나면서 서귀포지역을 바라보면 하효마을만 전등 불빛이 환하여 주변의 다른 마을과 비교되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재일교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기리고자 1966년 10월22일 기념비를 설치하였다.

하효의 전기시설은 주변의 마을들을 자극하여 하효마을 전기시설을 견학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상효마을은 전기시설 자금 확보를 위해 상효 마을 목장을 하효마을에 200만원에 매도하게 된다.



7. 신효동 애기업게돌, 구덕찬돌

<신효동 애기업개돌>


<신효동 구덕찬 돌>


[자료내용]

위치 : 서귀포시 신효동 산 10-6번지

월라봉 동쪽에는 서너 평 남짓한 바위굴이 있는데, 이 굴과 관련하여 마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과거 그 굴 안에는 서국이라는 체격이 건장한 남자가 부인과 살고 있었다. 서국이는 체구는 장대하고 건장한 남자인데 날품을 다니는 일도 없고 일정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지도 않았다. 서국의 부인은 얼굴도 예쁘고 요리에도 능해 부잣집에 불려가 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 반면, 서국은 부인 소개로 부잣집에 일을 도와주러 가도 밥을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먹어치우는 바람에 가는 곳마다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를 낳은 서국의 부인은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자 아기업개에게 아기를 맡기도 자신이 직접 돈벌러 나섰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관가에 큰 잔치가 며칠 동안 지속되는 바람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여러 날을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서국의 부인이 돌아오지 않자, 집에는 먹을 음식이 떨어지고 애기는 마냥 울어댔다. 동굴 밖에서 아기를 업은 채 서국의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기겁개는 그만 그 자리에서 아기를 업은 채 돌로 변하고 말았다.

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서국의 부인은 아기와 아기업개가 없어지고 빈 애기구덕만 남아있는 것을 보고 빈 구덕을 들고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아기와 아기업개가 돌로 변한 것을 보고 놀라 자신도 그만 그 자리에서 돌로 변했다.

한참 후 돌아온 서국은 아내와 아기업개가 모두 돌로 변한 것을 보면서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굴이 있는 일대를 '땅동산'이라 부른다. 땅동산에는 아기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는 아기업개돌과 빈 구덕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구덕찬 돌이 있어서 설화의 현장감을 더해준다.

후일 말을 탄 한 선비가 서국굴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날은 저물어 가는데 갑자기 벼락 천둥을 치며 장대비가 내리고 길이 물바다가 되어 갈 수가 없어서 하룻밤을 서국굴서 지새우게 되었다.

선비가 잠을 자며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멀쩡하게 잘생긴 동자가 나타나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몹시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동자가 굴속으로 들어와 숨자 그 뒤에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는 "선비님 방금 동자를 보지 못했습니까?"하고 묻자 선비는 대답도 못하고 어물쩡 거리는데 쫓아온 이는 "선비님 만약 동자를 보거든 꼭 잡아 주십시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선비는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비는 그치고 동이 터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동자가 숨은 자리에 간밤에 내린 비로 젖어 있는 찰흙을 손에 잡고 주물럭 거려 동자를 만들고 입담으로 "지나가는 길손들이 남기는 음식이나 얻어 먹어라"하며 한편 구석에 세워 두었다.

선비는 날이 밝자 말을 타고 길을 떠났는데 그 후에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선비가 탄 말도 그 앞에 오니 발어 절여 버렸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선비는 굴속으로 들여다 보니 자기가 만든 동자석이 있었다. "이놈의 짓이구나"하고 동자석을 잡고 허리를 부러뜨리니 붉은 피가 솟아 났다고 한다. 그 후에는 그 앞을 지나다니는 소나 말이 발을 저는 일이 없었다 한다.


8. 신효동 이윤 묘

[자료내용]

위치 : 신효동 19-4번디. 월라봉 남쪽 절벽 위. 감귤박물관 야외무대 남쪽 100여m지점

시대 : 조선

월라봉 큰머리 큰 산이 있는 곳을 올라가면, 북쪽으로는 한라산, 남쪽으로는 태평양,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남일대가 시원스럽게 내다 보이고 다시 동쪽을 보면 큰내가 신효와 하효를 껴안고, 산세 좋은 곳임을 직감케 하는 봉우리에 "朝鮮國訓總院判官 李允之墓"라고 쓰여진 "큰비석 큰산"이 있다.

조선시대 아라동에 살던 이훈장 부친이 돌아갔을 때의 일로, 이훈장은 부친을 모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궁리하던 중, 산터를 잘보고 풍수지리에 능한 명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의논케 하였다. 명인은 정의 고을에 효돈이라는 마을에 월라봉이 있는데 그 곳에 천리(묘를 옮김, 移葬) 터가 있으니 한번 가 보시라고 말한다. 훈장은 명인을 말에 태우고 함께 월라봉으로 와서는 묘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월라봉 큰머리는 "신두형'이라 하여 몇 년에 한번씩 남쪽벽이 떨어질 때마다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고, 앞에서는 용이 재주를 부리고, 삼도의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어 문장가가 태어나 자손대대로 번창할 산터라 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이훈장은 비록 일이 어렵게 되긴 하였지만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끝내는 장사를 치루었다.

당시에는 초상집 곡소리가 십리밖까지 들려야 된다 하여 제주에서 목소리 좋은 여인들은 모두 동원하여 울게 했다는 말도 전해 오고 있다. 남정네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상여도 메야지, 한라산 중허리를 생작으로 길을 내, 아라동에서 월라봉까지 오려고 하니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고, 또한 수십명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니 백명 넘게 동원을 했을 것이다. 이훈장이 부친 장례를 치를 당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훈장댁이 세력에 좋고 재력좋은 집이라 훈장댁을 돕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또한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 묘의 주인공 이윤은 경주 이씨 국당공파 제주입도조가 된다.

월라봉-큰머리-큰산에 관한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죽은 이의 묘터가 후손의 성패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선조들의 믿음이 빚어 낸 일화이다.(1996 신효마을지)

이윤의 할아버지는 간옹 이익이다. 유배생활 중 김만일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인제를 낳았다. 인제는 윤을 낳았으나 묘가 제주에 있다는 기록이 없어서 신효마을지에서는 이윤을 입도조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이익을 입도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9. 신효동 포제단

[자료내용]

소재지 : 서귀포시 신효동 산 1번지 일대 월라봉 동쪽 봉우리

유형 : 민속신앙(포제단)

시대 : 조선~

신효동 포제단은 월라봉 동쪽 봉우리 조금 아래쪽에 있다 지번상으로는 산 1번지에 해당한다. 비석돌 형태로 다듬은 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제단을 만들었다. 제를 지낸 후에는 제단 위에 새(띠)를 베어 덮어 둔다. 제단 앞과 옆에 다듬은 작은 돌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다. 이는 제관이 서는 위치와 준소(술항아니 놓는 곳), 관세위(손 씻는 곳), 망료위(축문 등을 태우는 곳) 등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울타리는 따로 두르지 않았다. 제단 앞쪽은 조금 경사가 있으나 비교적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감귤박물관 건물 옆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포제단 앞까지 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매년 마을제를 지내는 곳이이서 이곳을 '포제동산'이라 부른다.

신효마을의 포제가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향리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후기 18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정월 초정해일(丁亥日) 자시(子時)에 제를 지낸다. 포제에서 바라는 내용은 축문을 통해서 알아보면 掃彼驅災(재해를 당하지 않게 함) 萬福咸臻(만복을 가져다 줌) 鄕民화합(마을 사람들이 화합함) 萬事如意(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짐) 所願成就(소원이 모두 이루어짐) 등이다.

일제치하에서는 페습이라 하여 금지했기 때문에 몰래 숨어서 지낸 적도 있고 해방 이후에도 관에서 미신이라 하여 금지한 적이 있어 지내지 못한 해가 있었으나 거르지  않고 지속하려고 노력하였다.

포제를 행하기 위해서는 포제향회를 개최하여 제관, 제물, 제청을 마련하고 제사준비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의논하고 정한다. 우선 마을 향장(구장, 이장, 마을회장)이  포제향회 날짜를 정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향사(마을회관)에 모여 성씨별로 제관을 정하고 필요한 경비를 산출하고 제청을 정한다.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예전에는 집집마다 곡물로 정해진 양을 바쳤으나 최근에는 동민의 자율적인 찬조금, 희사금, 마을회 기금, 지원금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10. 하효동 쇠소깍

[자료내용]

위치 : 효례천 하류 지역으로 바다와 연결되는 곳

유형 : 경승지, 어로시설, 민속신앙, 전설유적

하효마을의 본래 명칭은 '쉐둔'이다. '효례천'하구에 있는 소라 하여 쉐소, 쇠고, 세소, 새소, 새수라 불려지고 있으며, 깍은 '쉐소'의 마지막(끝)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깍'은 맨 마지막 부분을 나타내는 제주어이다. 또는 '신소'라고 부르기도 하나 '새'를 '새로운'으로 생각하여 그걸 한자로 바꾸어 '新'이라고 한 것인데 이는 잘못이라고 본다.

냇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인데 양쪽 물이 만나 부딪히면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바다에서 보면, 내 동쪽의 '우금'과 서쪽의 '소깍'으로 말미암아 깊숙하게 후미진 곳이다.

인공이 필요없는 천연적인 포구였던 셈이다. 옛날에는 하효 포구로 사용하였으며 포구로 쓸 때 배를 매었던 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내의 양쪽은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물이 깨끗하고 푸르게 보여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효례천은 서귀포시 하효동과 남원읍 하례리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옛 조상들이 밭농사를 지을 때 가뭄이 들면 집집마다에서 제물을 모아 정성을 다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와서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를 내리게 하는 용이 산다고 하여 '용소'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 마을 양반집의 딸과 그 집의 머슴의 아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양반의 부모는 머슴 가족을 멀리 내쫓아 버렸다. 머슴의 아들은 너무나 억울하여 효례천에 있는 '남내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남내소'는 너무 깊어 여기에 빠지면 사람의 힘으로는 건져낼 수 없기 때문에 주인집 딸은 부모 몰래 매일 밤 자시(子時, 밤 열두시 전후)에 이곳 바위에서 비를 내려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100일째 되는 날 밤에는 갑자기 큰비가 내려 '남내소'의 물이 넘쳤다.

물이 넘치자 총각의 시체가 떠올라 냇물을 따라 '쉐소'로 떠내려가 모래 위로 올라왔다. 처녀는 총각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슬피 울다가 바위 위로 올라가서 역시 깊은 소에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 마을에서는 처녀의 넋을 위로하고자 하효마을 동쪽 '용지동산'에 당을 마련하여 '할망당'(요드렛당)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 후로는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밤에 제관이 할망당에서 용지부인석(龍旨婦人石)을 모셔다가 제단을 올려놓고 제를 시작한다고 한다.


<하효동 효돈 요드렛당>


※구담 김보성 선생님의 자료일부를 그대로 옮기며 사진은 답사 중 직접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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