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유산답사회원들과 함께하는 제270차 제주역사기행
구룸비 정연숙 선생님의 안내로 김녕리를 집중탐구 해본다.
김녕의 설촌은 구좌지역에서 가장 오래인 것으로 추정된다.
궤네기동굴에서는 점토토기나 조개화살촉 등 신석기초기의 생활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심방의 본풀이에도 이 지역의 최초 주거지를 궤네기동굴이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26년 처음 김녕이 공식기록에 나타나는데 현촌을 설치하면서 부터이다.
조선초기에 방호소를 설치하지만 1510년 중종5년에 우도와 가까운 별방(하도)으로 옮겨 진성을 만드니 김년방호소는 폐지된다.
마을 사람들은 '짐녕'이라 하기도 하는데, 짐녕개[金寧浦] 주위에 들어선 마을이라는 의미로 김녕이라 했다.
'富하고 平安한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김녕곶을 산머리로 두고 동으로 입산봉과 가수코지가 이어지고 서로는 묘산봉과 목지코지로 뻗어가고 가운데로 김녕곶과 하늘내로 연결되어 커다란 '金'자를 형성한다고 한다. 또한 산에서 바라봤을 때 '平'자를 이룬 모양이라서 '金寧'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1. 포제단(서김녕포제단)
묘향봉이 보이는 곳에 포제단이 있다.
답사 일주일전만해도 없던 철구조물이 포제단앞에 새로 버티고 있어 조금 당황스럽다.
새로 샷시문을 만들어 잠가 두어 안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2. 광산김씨입도조 김윤조 묘
명문가의 후손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김윤조는 신돈을 주멸하려다 발각된 김흥조의 아우로 멸문의 위기에 놓이자 신돈을 피해 제주 김녕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되었다.
현재 제주에는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려진 무덤이 얼마되지 않는다. 1270년 김수 장군 묘, 1390년대 스스로 도망 온 자들 중에 한천, 김윤조, 김만희 등, 1400년대 초 강영의 묘 등이 있다. 강영의 묘는 1950년대 원묘가 되었다.
제주 대부분의 무덤에서 보이는 형태를 용묘라 하며 사각의 묘를 방묘라 하고 육지에서 주로 보이는 둥근 형태를 원묘라 한다.
3. 남문동굴
4. 궤네깃당
궤네깃또를 모시는 신당이다. 마을에 전승되는 무당의 본풀이에 의하면 최초의 정착지가 바로 궤네깃동굴이라고 한다.
이 동굴안에 궤네기또가 좌정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통돼지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하며 '돗제'풍습이 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왼쪽에 제단처럼 쌓은 모습이 보이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돼지머리뼈가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깨진 토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당은 원래 물색을 올리는 당이 아닌데 외지인들이 들어와 무당으로서 정성을 들이며 올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당으로써 제를 지내는 곳은 아니다.
5. 성세깃당
성세기당은 성세기포구 동쪽에 붙여 마련된 당이었는데 주변 개발로 세비웃당으로 옮겨 통합하고 성세깃당으로 부른 것이라 한다.
성세기란 말은 사람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모래가 성처럼 쌓였다는 말이라고도 한다.
6. 김녕방호소 터
조선 중기에 설치된 수산진으로부터 중기에 설치된 화북진까지 모두 9곳에 방호소가 설치되었으나, 성이 축조되지 않아 방어하기가 어려우므로 축성을 건의 하기도 하였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앞서 설치한 방호소에 각각 육군 1려(旅)를 2번으로 나누고 군관을 보내어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 수산과 차귀 2포는 옛 성을 개수하고 함정과 말뚝을 설치하였습니다. 나머지 7포는 원래 성이 없었으므로 지키는 데 의지할 곳이 없어 매우 허술합니다."라고 하였다. 즉, 성을 쌓지 않은 방호소 7곳(김년방호소 포함)이 있으며, 이들 방군(防軍)은 교대로 나누어 방어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남흘동 물통
용천수가 나는 동네가 아니라 물을 직접 팠다고 한다.
8. ㄴ.멀잇당(ㄴ.ㅁ.릿당, 자원당, 일뤳당)
팽나무 아래 시멘트로 간단히 제단을 마련하여 당으로 삼고 있다. 15세 미만의 어린이의 무병안전을 주관하는 당이다.
그래서인지 아기구덕이 있고 제물로 사탕이 보이기도 한다.
9. 흐릿물(흐린물, 흐른물, 흘림물)
10. 고냥물(큰수감물)
11. 수감물
수감물 옆에 붙은 밭이 절터였다. 밀물때 바닷물과 합쳐지는 기수역이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습지이다.
12. 비석거리
철비(비철)의 흔적이 보인다. 아래 두번째 사진 가장 오른쪽 지금은 뒤로 기우러져 있는 비가 바로 그것이다. 세번째사진에 자세히 보인다.
동네사람이 '양헌수'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13. 김녕정사(金寧精舍) 터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설치되어 학문을 가르치던 학원(私學,사학)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인종1년(1545년) 11월에 부제학 자리에 있던 임형수(林亨秀)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어 부임했다가 다음해 10월 파직되어 떠났다. 그가 제주목사 재임 중 김녕포구에 김녕정사를 건립했다. 관청의 자재로 관덕정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바로 앞 지금의 새마을금고 자리가 김녕현청 터라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이곳 대충동은 김녕의 중심지였다.
14. 게웃샘굴과 게웃샘물
안내글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게웃샘물'은 '게웃샘굴'이라는 용암동굴 속 바위틈에서 솟아 250m쯤 떨어진 바닷가 청굴물까지 이어집니다. '게우'는 전복창자, '게웃'은 전복창자처럼 한쪽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이르는 제주토박이말입니다. 이 동굴이 해녀들이 많은 김녕마을의 사람들이 보기엔 그리 보여서 '게웃샘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상수도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주변 200여 가구에서 이 물에 의존해 살았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게웃샘물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차갑고 맛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15. 서련판관기념비(徐憐判官記念碑)
서련은 서희의 후손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고으니ㅁ.루에서 낙마했다고 하는데 역사기록에는 병사한 것으로 나온다. 그의 할아버지가 부모를 일찍 여의어 불쌍하다고 '련(憐)'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서련 판관의 뱀 퇴치 전설은 대체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악습이 없어지게 된 유래담이 인신공희설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전체적인 특성과 상통한다.
16. 병풍ㅁ.를
용암이 흘러가다 기온차에 의해 표면이 먼저 식어 동굴이 형성되는데, 동굴 속 압력이 높아 부풀어 올라 깨진 튜물러스(용암언덕)이다.
열곡(裂谷)이라고도 한다.
17. 환해장성
대부분의 다른 환해장성이 문화재로 지정 복원되면서 오히려 원래의 모습을 잃어 안타깝다. 그런 면에서 김녕의 환해장성은 옛모습을 볼 수 있어 더 가치가 있다. 바닷가 쪽 성벽엔 물이 들어왔을 때의 수면 높이 흔적이 보인다. 이 지역은 배를 대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왜구는 주로 포구로 들어오는데 배가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 환해장성이 있다는 것은 당시 목사의 횡포일 가능성이 크다.
새끼줄구조
18. 민간등대 도대불(옛등대)
도대불의 어원은 여러가지가 있다. 돛대처럼 높은 대를 이용해 불을 밝혔다해서 돛대불이 도대불이 되었다고도 하고, 뱃길을 밝히는 것이라 해서 도대(道臺)불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어 '도우다이(등대)'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일부지역은 '등명대(燈明臺)'라 하기도 하고, 조천읍 신촌리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관망대'라고 한다.
19. 청굴물
20. 백련사
대웅전 주불로는 17세기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21. 서문하르방당
오래 전 어느 날, 파평 윤씨 집안의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갔다. 백 발의 줄을 던지고 묵직한 것이 걸려서 잡아당겼더니 커다란 돌멩이였다. 투덜대면서 바다로 던지고는 자리를 옮겨서 줄을 던졌는데 그 돌멩이가 또 걸린다. 그렇게 셋째 번에도 같은 돌이 걸리자 윤씨 할아버지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조상이라고 여기고 돌을 모시고 왔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미륵이다. 제주에 있는 어느 절에 모실 미륵인데, 파선이 되어 건너가지 못하겠구나. 나를 잘 모시면 부귀영화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그 돌을 모셨더니 큰 부자가 되어 파평 윤씨 일가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화북 윤동지하르방당에도 거의 비슷한 화소가 있다.
이 당은 아기 점지해 주는 역할이 크다. 얼마 전까지도 기도해서 아기를 낳았다는 얘기가 많다.
22. 목지코지석교
* 대부분의 자료는 답사 때 나누어진 자료집에 의한 것으로 원본은 제주문화유산답사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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